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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현실과 거리가 먼 장르일까요.”
화려한 우연과 운명 같은 사랑, 완벽한 남녀 주인공의 만남. 오늘날 우리가 소비하는 로맨스에는 익숙한 공식들이 있습니다. 첫인상의 오해, 서로를 미워하며 시작되는 관계,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 그리고 갈등 끝에 찾아오는 해피엔딩. 너무 익숙해서 진부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이 공식들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됐을까요.
그 답은 200여 년 전 영국의 한 여성 작가에게 닿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저자 제인 오스틴입니다. 1775년 태어난 오스틴은 귀족도, 유명한 문학가 집안의 자녀도 아니었습니다. 성직자의 딸로 태어나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이름조차 내세우지 못한 채 작품을 ‘By a Lady(한 숙녀에 의해)’라는 익명으로 출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본 세상은 누구보다 날카로웠습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에게 결혼은 사랑보다 생존에 가까운 문제였습니다. 재산을 상속받기 어려웠고 사회적 활동에도 제약이 많았습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일은 개인의 행복 이전에 삶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이었는데요. 오스틴은 이러한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보다 평범한 일상과 대화를 통해 담담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더욱 설득력을 얻죠.
대표작 『오만과 편견』 역시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랑을 떠올리지만, 오스틴이 진짜 그리고 싶었던 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었습니다.
다아시는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라는 오만을 가지고 있었고, 엘리자베스는 첫인상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는 편견을 품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바꾸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장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작품의 제목이 인물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로맨스 장르의 대표적인 클리셰 대부분이 이미 이 작품 안에 담겨 있다는 점입니다. 첫 만남의 악연, 서로를 오해하는 관계, 차갑지만 진심은 깊은 남자 주인공,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자 주인공, 신분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 그리고 오해를 극복하며 완성되는 사랑. 지금도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웹소설에서 반복되는 서사의 뼈대가 『오만과 편견』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오스틴은 독자의 설렘만을 위해 이러한 장치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맨스를 통해 인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외모와 지위, 첫인상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존재인지, 그리고 진정한 관계는 자신의 편견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은 단순히 ‘로맨스 소설의 대가’가 아닙니다. 인간을 가장 현실적으로 관찰한 작가이며, 사랑을 통해 사회를 비춘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이 200년이 넘도록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대는 변했고 결혼의 의미도 달라졌지만,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하는 우리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좋은 고전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래도록 현재를 비추는 이야기입니다. 『오만과 편견』을 읽는다는 것은 한 편의 로맨스를 감상하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오만과 편견을 마주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가장 우아하게 던진 사람이 바로 제인 오스틴이었습니다.
이야기씨 이경남 eyaki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