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문을 연 남산 ‘한국숲정원’

남산 한국숲정원

도심 속 선비의 풍류와 영혼의 치유… 새로 문을 연 남산 ‘한국숲정원’을 거닐다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짙어가는 계절, 복잡한 빌딩 숲을 잠시 벗어나 자연이 건네는 고요한 위로 속에 머물고 싶어질 때가 있다. 소음과 속도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서울의 중심이자 오랜 세월 시민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어준 남산 야외식물원(용산구 이태원동) 일대가 한국 고유의 미학과 전통 정원의 정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한국숲정원’으로 새단장을 마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

약 3만㎡(약 9000평)에 달하는 이 드넓은 공간은 단순히 눈으로만 보는 조경을 넘어, 발끝으로 흙을 밟고 귀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오감을 깨우는 ‘치유형 정원’으로 조성됐다. 1997년 처음 조성된 이후 시민들의 산책로로 사랑받아온 야외식물원의 식재를 더욱 풍성하게 다듬고, 전국의 대표적인 명소 숲과 전통 정원의 요소를 조화롭게 녹여낸 것이 특징이다. 화려함 대신 은은한 여백의 미를 강조한 이곳의 3대 테마, 11개 정원을 따라 걸으며 마음의 속도를 한 걸음 늦춰보았다.

담양 소쇄원에서 제주 곶자왈까지, 정원에 담긴 조선의 풍류
정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전통과 문화의 숲 정원’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곳은 과거 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기던 전통 정원의 멋을 현대적 감각으로 복원한 공간이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담양 소쇄원과 죽녹원을 모티브로 조성된 ‘지당원’이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잠시 빌려와 내 정원의 일부로 삼는다는 전통 조경 기법인 ‘차경(借景)’을 충실히 구현했다. 대나무 숲과 잔잔한 연못, 그리고 그 정취를 고스란히 담아낸 정자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어우러진다. 정자 지붕에는 여름철 내리쬐는 뜨거운 열을 차단하면서도 주변의 푸른 풍경을 투명하게 투사하는 현대적 플릿글라스 공법이 도입돼, 전통의 멋과 현대 기술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지당원을 나와 조금 걷다 보면 담양 명옥헌의 정서를 옮겨온 ‘영지원’이 나타난다. 잔잔하고 거울 같은 연못 위로 배롱나무의 붉은빛과 숲의 푸른 실루엣이 투영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맑게 정화해 준다. 우리 조상들이 정원을 만들며 추구했던 절제와 사색의 미학이 무엇인지 소리 없이 웅변하는 듯하다. 옆으로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가 단아하게 피어난 ‘무궁화원’이 깊이를 더한다.

초록 이끼와 소나무 향기, 오감으로 느끼는 ‘숲멍’의 시간
발걸음을 조금 더 깊숙이 옮기면 숲의 감각이 가장 짙게 묻어나는 ‘자연과 생태의 숲 정원’ 구역으로 연결된다. 철쭉동산과 매화원을 지나 만나는 ‘이끼원’은 제주 곶자왈을 모티브로 삼았다. 남산의 짙은 나무 그늘과 어우러진 깊고 고요한 이끼 경관은 단숨에 시선을 빼앗는 화려함은 없지만,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낮은 곳에서 천천히 자라난 생명의 촘촘한 결을 느끼게 한다. 바쁜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발밑의 작은 생명에 집중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대나무 숲 ‘죽림원’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대나무들 사이로 초여름의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죽림원’은 청량함 그 자체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대나무 잎들이 서각거리며 부딪히는 소리는 그 어떤 오케스트라 음악보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 준다.

이번 한국숲정원의 백미 중 하나는 울진 금강소나무숲의 형태를 딴 ‘솔숲원’이다. 기존 남산이 가지고 있던 울창한 소나무 군락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 아래로 부드러운 ‘숲속 맨발길’을 조성했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고스란히 흙을 밟을 때 전해지는 촉각,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솔향기는 도심 한가운데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천연 치유제다.

오래된 숲과 현대적 도시의 공존, ‘남산마루’에 서다
마지막 테마인 ‘휴양과 휴식의 숲 정원’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도시의 공존을 사색하게 하는 공간이다. 이곳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강진 다산초당을 모티브로 삼은 조망 공간 ‘남산마루’다.

바닥을 철제 그레이팅 구조로 만들고 난간을 투명하게 설계하여 개방감을 극대화했다. 이곳에 서면 발밑으로는 수백 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울창한 남산의 생태 숲이 내려다보이고, 고개를 들면 저 멀리 서울 도심의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공이 충돌하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풍경으로 어우러지는 순간이다. 남산마루에서 내려와 작은 앞마당처럼 친근하게 조성된 ‘솔숲마당’과 ‘은행나무뜰’ 벤치에 앉아 바람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의 허기가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인생의 가을 길목에서 만난 조용한 위로
남산 한국숲정원은 단순히 나무를 심고 정자를 세운 조경 공간이 아니다. 매화나무, 배롱나무, 소나무 등 우리 땅에서 자란 자생종을 중심으로 채워진 이 정원은,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고 계절의 흐름에 순응하며 깊어지는 한국 전통 정원의 철학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은퇴 후 삶의 속도를 조절하며 제2의 인생을 디자인해 나가는 신중년들에게 이곳은 훌륭한 사색의 공간이 되어준다. 숲길을 천천히 거닐고, 정자에 앉아 바람을 느끼며, 맨발로 흙을 밟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자연이 건네는 조용한 위로와 조우하게 된다. 이번 주말, 오랜 세월 우리 곁을 지켜준 남산이 정성스레 차려낸 푸른 정원 속으로 걸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그곳에서 마음속 정서적 허기를 채워줄 깊은 풍류와 여백의 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야기씨 이경남 eyak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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