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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밤이 무서워지던 기억, 호랑이가 문 밖에 있을 것만 같던 기억. 어머니가 들려주시든, 선생님이 교실에서 읽어 주시든,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그렇게 누구의 유년 속에든 깊이 새겨진 이야기입니다.
이억배 작가의 『오누이 이야기』를 처음 펼쳤을 때, 그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이 그림책은 사실 오래된 그림입니다. 이억배 작가가 1996년에 그려 전집의 일부로 선보였던 그림을 스무 해가 지나 새롭게 단행본으로 엮었습니다. 그런데 오래됐다는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켜켜이 쌓인 덕분에, 그림에서 묵직한 온도가 느껴집니다.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색입니다. 짙고 번지는 청색이 화면 전체를 감쌉니다. 산속의 밤이 그토록 짙고 투명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청색의 밤 속에 구불구불 솟은 고목, 털 한 올 한 올이 살아 있는 것 같은 호랑이가 그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무섭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웃음이 납니다. 민화 속 익살스러운 호랑이처럼 과장되고 해학적이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불빛 새어 나오는 초가집, 큰 나무 위로 몸을 피한 아이들, 달빛 아래 번뜩이는 호랑이 눈동자가 그림 한 장에 온기와 긴장감을 동시에 불어넣지요.
원화의 실제 크기가 65cm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크기에 맞게 판형도 일반 그림책보다 크고 세로로 길게 만들어졌습니다. 재단선 바깥의 그림까지 살려내 원화 본연의 자연스러운 맛이 지면 위에 그대로 숨 쉽니다. 펼칠 때마다 이것이 인쇄된 종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됩니다.
이억배 작가가 이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던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릴 적 선생님이 들려준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가 늘 마음에 머물렀죠. 이야기 속 초가집이 상상이 아니라 우리 집 같았고, 마당에서 곧장 펼쳐질 듯 생생했어요.”
마음에 오래 머문 이야기가 결국 그림책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에서는 옛이야기를 ‘재현’하려는 의지보다, 기억 속의 장면을 ‘되살리려는’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어머니를 잡아먹는 호랑이의 잔혹함보다,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챙기고 재치를 발휘하는 오누이의 인간적인 면모에 눈길이 닿습니다. 두려운 상황에서도 순간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 아이들의 모습이, 오히려 더 마음을 붙잡습니다.
이억배 작가는 민화와 풍속화에 뿌리를 둔 자신만의 화풍으로 한국 창작그림책 1세대를 일군 작가입니다. 1980~90년대 민중미술 활동을 거쳐, 그림책이라는 형식 안에서 공동체의 온기와 해학을 담아 왔습니다. 붓과 물감으로 최소 1년 이상 한 작품에 매달리는 방식도 변함없습니다. 오래 들여다봐야만 보이는 것들이 그림 속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2026년 3월, 이억배 작가의 『오누이 이야기』가 제63회 볼로냐 라가치상 특별부문(우화와 옛이야기)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볼로냐 라가치상은 아동 출판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상입니다. 올해 특별부문의 주제가 ‘우화와 옛이야기’였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을 통해 본 것은 단순히 잘 그려진 그림책이 아니었을 겁니다. 구전으로 이어져 온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방식, 그 전승의 가치 자체를 인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라져 가는 옛이야기 전승의 가치를 세계가 알아본 순간이었습니다.
이 그림책을 펼치면 호랑이에게 쫓기며 하늘로 올라가는 오누이와 함께, 어린 시절 어딘가에서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나 자신도 잠깐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좋은 옛이야기가 가진 힘입니다. 그리고 이억배의 그림은 그 힘을 고스란히 품고 있습니다.
이야기씨 김소영 eyakic@eyakic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