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꼭 읽어야 할 그림책

넉 점 반, 시 윤석중 | 그림 이영경 | 창비 (2003)

넉 점 반
시 윤석중 | 그림 이영경 | 창비 (2003)

그림책 소개 글을 쓰다 보면 가끔 내가 이 책에 대해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막막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림책 『넉 점 반』이 딱 그렇습니다. 이 책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간단합니다. 한 여자 아이가 엄마의 심부름으로 가겟집에 시간을 물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놀이에 정신이 팔려 해가 꼴딱 질 때까지 헤매다 집에 돌아오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이야기가 그림책 한 권이 되어 손에 쥐어지는 순간, 무언가가 가슴에 쿵 하고 내려앉습니다.


‘넉 점 반’은 ‘네 시 반’의 옛말입니다. 1940년에 윤석중 선생이 쓴 동시를 이영경 작가가 60여 년이 지나 그림책으로 새롭게 펼쳐 보인 작품이죠. 그림책이 세상에 나오기 며칠 전, 윤석중 선생이 세상을 떠났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의 묵직함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시계가 집집마다 없던 시절, 단발머리 여자아이가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갑니다.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가겟집 영감님은 툭 내던지듯 대답합니다. “넉 점 반이다.” 아이는 그 말을 꼭 쥐고 집으로 향합니다.

넉 점 반 중에서

“넉 점 반 넉 점 반”

그런데 아이의 발길은 곧장 집으로 가지 못합니다. 마당 한 켠에서 물을 마시는 닭 앞에 멈춰 서서 한참을 구경합니다. 개미 떼가 줄지어 가는 땅바닥 앞에선 쪼그려 앉습니다. 잠자리가 날아오르자 냉큼 따라갑니다. 분꽃 한 송이를 따서 입에 물고 혼자 흥얼흥얼 노닥거립니다. 그렇게 해가 꼴딱 지고서야 집에 돌아온 아이는 당당하게 외칩니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이 마지막 한 마디에 이 그림책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어이없는 엄마의 표정, 저녁을 먹는 형제들 사이로 슬그머니 끼어드는 멋쩍은 아이의 모습. 어른은 웃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 아이는 그게 왜 웃긴지 아직 모릅니다.


이영경 작가는 동시의 짧은 행 사이사이를 그림으로 넓혀 놓았습니다. 시에서는 닭, 개미, 잠자리만 등장하지만 그림 속에는 고양이, 두꺼비, 메추라기 같은 동물들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등장합니다. 아이의 시선이 머무는 곳마다 세계 하나가 열립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 순간 독자 자신도 그 아이를 따라 놀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습니다. 그게 이 그림책의 힘입니다.


그림의 결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다홍 치마를 입은 주인공 아이를 빼고는 색을 극도로 절제했습니다. 바랜 한지를 닮은 바탕색, 갈색과 노란색이 주조를 이루는 차분한 화면. 1960년대 충남 농촌 마을의 질감을 되살리기 위해 작가는 서산 운산마을을 여러 차례 직접 돌아보았고,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공들인 시간이 그림 구석구석에 배어 있죠. 책 본문의 서체도 그냥 지나치기 아깝습니다. 조선 시대 문헌 『오륜행실도』의 글자를 하나하나 집자해 만든 것으로, 시와 그림의 정서를 고스란히 받쳐 줍니다.


이 책에는 작은 반전이 하나 있습니다. 온 동네를 빙글빙글 돌아 헤매고 돌아온 아이의 집은, 사실 가게 바로 옆집입니다. 그것을 알고 나면 두 번 웃게 됩니다. 처음엔 아이가 우습고, 다음엔 우리 자신이 우습습니다. 우리도 늘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출간된 지 20년이 지났고 누적 10만 부 이상 팔렸습니다. 2023년 20주년 기념 개정판이 나오면서 표지가 새로워지고 판형도 커졌지만, 이야기의 힘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에 대한 시각을 회상하며, 오래 된 어느 시절의 한 부분을 잃어버렸다면, 이 그림책 앞에서 잠시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씨 김소영 eyakic@naver.com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