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와일리, 육아와 가사로 묻어둔 붓 다시 예술로

늦깎이 거장의 반란: 로즈 와일리의 그림은 왜 세상의 편견을 깨는가

로즈와일리 1934~, 영국

76세에 영국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로즈 와일리

미술계에는 흔히 ‘천재는 요절하거나 혹은 일찍 꽃피운다’는 통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견고한 편견을 단번에 깨뜨린 예술가가 있다. 캔버스 위에 자유롭고 거침없는 필치로 삶의 에너지를 쏟아내는 영국의 화가 로즈 와일리(Rose Wylie)가 그 주인공이다. 76세라는 나이에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영국 현대미술의 가장 뜨거운 아이콘이 된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열정에는 퇴직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육아와 가사로 묻어둔 붓, 다시 예술을 향하다

1934년생인 로즈 와일리는 젊은 시절 미술을 전공했지만, 결혼과 육아라는 삶의 현실 앞에서 한동안 붓을 내려놓아야 했다.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그녀가 다시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40대 중반 무렵이었다. 전업 작가로서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그녀를 비껴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와일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같이 캔버스 앞에 섰고, 자신의 일상을 시각적인 일기로 기록해 나갔다.

그녀의 작품은 세련된 기교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캔버스를 바닥에 깔아놓고 붓을 휘두르는 그녀의 화법은 매우 직관적이고 때로는 아이의 그림처럼 순수하다. 복잡한 현대 미술의 담론 속에서도 그녀가 이토록 환영받는 이유는 바로 이 ‘솔직함’에 있다. 꾸밈없는 표현 속에는 80년 넘게 살아온 한 인간이 느낀 삶의 기쁨, 고통, 유머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ellow Strip 2006

세상 모든 것이 예술의 소재가 되다

로즈 와일리의 예술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소재의 다양성이다. 그녀는 고상한 예술적 주제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신문 기사 속 짧은 뉴스, TV에서 본 만화 ‘사우스파크’, 길가에 핀 꽃, 그리고 찰나의 기억까지 그녀의 눈에 포착된 모든 것은 캔버스 위에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특히 그녀는 그림 속에 텍스트를 적어 넣는 방식을 즐긴다. 이는 마치 그림과 글이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주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의 맥락을 스스로 해석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장치다. 2014년 존 무어 페인팅 상 수상은 그녀의 이러한 독특한 화법이 비로소 시대와 조우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018년 영국 대영제국 훈장(OBE)을 받으며 그녀는 명실상부한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예술을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로즈 와일리는 자신의 나이에 대해 묻는 질문에 늘 단호하게 답한다. “예술가에게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녀는 90세가 넘은 지금도 밤늦게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캔버스 위에서만큼은 나이나 사회적 편견이 개입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보는 시니어 세대에게 큰 귀감이 된다. 은퇴 후의 삶을 단순히 ‘여생’으로 치부하는 대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로즈 와일리의 그림은 단순히 ‘보는 예술’을 넘어 ‘살아내는 예술’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늦깎이 거장이 써 내려가는 유쾌하고도 치열한 예술 일기는, 오늘도 삶이라는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주저하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라는 물감을 덧칠해주고 있다.

이야기씨 김소영 eyak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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