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옥 그녀 나이 93세, 지금도 현역이다

한국 패션 1세대 거장, 60년 경력 그 이상의 이야기

MBC 소라와진경, 한국 패션계의 대모 진태옥 디자이너. 1934년생으로 올해 93세인 그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초고령사회가 도래하면서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오래 잘 사는 삶’에 대해 자주, 그리고 깊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수의 기준은 여전히 낡은 잣대에 머물러 있다. 신체 나이가 얼마나 젊은지, 지병은 없는지, 혹은 얼마나 ‘동안(童顔)’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지와 같은 외형적 수치들이 건강한 노년의 척도가 되곤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의미의 ‘건강한 나이 듦’은 단순히 생물학적 시간을 견뎌내는 생존 그 이상을 의미한다. 최근 우리 곁에서 빛나는 90대 현역, 진태옥 디자이너의 모습은 그 답이 생물학적 수치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곳에 있음을 시사한다.

MBC ‘소라와 진경’ 2화

지난 5월 3일 방영된 MBC 예능 ‘소라와 진경’에서 한 장면이 유독 시청자들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1세대 슈퍼모델 이소라와 홍진경이 파리 패션위크 런웨이 재도전을 앞두고 자신감을 잃어갈 무렵, 93세의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이 등장해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프로는 나이가 없다.” 화려한 연출도 긴 설명도 없었다. 그 한마디가 바닥을 친 두 사람의 자존감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방송 이후 오랫동안 회자됐다.

방송에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기로 유명한 진태옥이 출연한 이유는 단 하나, 후배들의 도전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그 사실 자체가 그의 성품과 철학을 말해준다.

피난지의 광목 셔츠에서 피어난 패션 인생
진태옥은 193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1948년 온 가족이 월남했고, 6·25전쟁으로 제주도까지 피란길에 올랐다. 혼란의 시대를 살아낸 그에게 아름다움의 원점은 의외로 소박했다. 제주도 흙집 창문 앞에 걸린 오라버니의 흰 광목 셔츠 — 빛이 섬유조직을 투과하며 만들어낸 그 순간의 감동이 이후 60년 패션 인생의 뿌리가 됐다.

법관을 꿈꾸던 그는 서울대 법대 입시에 낙방한 뒤, 우연히 들른 노라노 의상실에서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처음 눈에 담았다. 스물여섯에 명동 이종천패션연구소를 찾아가 공부를 시작했고, 1965년 서울 명동에 여성복 부티크 ‘프랑소와즈’를 열며 한국 패션계에 정식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진태옥의 이름은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장면들과 함께 기록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 유니폼, 아시아나항공 승무원 유니폼, 그리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공연 의상까지. 단순한 옷을 넘어 국가적 행사의 상징을 직조해온 것이다.

1990년에는 후배 디자이너들과 뜻을 모아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를 창단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국내 디자이너들의 해외 컬렉션 진출에 도약대를 마련한 것도 그였다. 이후 1993년부터는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시즌마다 참가하며 한국 패션을 세계 무대에 올려 세웠다. 1999년에는 영국의 예술 전문 출판사 파이돈이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패션인 500인’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아흔을 넘겨도 여전히 출근이 설레는 이유
‘소라와 진경’ 출연에서 진태옥이 보여준 것은 강연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는 지금도 매일 수영 1000m를 하며 몸을 관리하고, 아이돌 음악을 찾아 들으며 최신 감각을 익힌다. 환갑의 나이에 파리 컬렉션에 도전했던 경험을 돌아보며 “인생 자체가 끝나는 날까지 도전”이라는 말을 후배들에게 건넸다. 93세가 되어서도 출근길이 설렌다는 그의 말은 덤덤했지만 그래서 더 울림이 컸다.

그는 완벽주의자로도 유명하다. 자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일어나 작업을 이어가고, 스스로 “섬광처럼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마를 때까지 일을 계속하겠다”고 말해온 사람이다. 흑백을 즐기는 깔끔한 매무새, 흐트러지지 않는 몸매와 태도는 수십 년 전 인터뷰에서도, 지금 방송 화면에서도 그대로다.

감각을 축적해온 60년
한 패션 평론가는 “프랑스의 샤넬에게 트위드 재킷이 있고, 영국의 비비안 웨스트우드에게 뷔스티에가 있다면, 한국의 진태옥에게는 화이트셔츠가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그의 정체성은 하나의 아이템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 뿌리 위에서 그는 끊임없이 실험하고 도전해왔다. 2016년 서울패션위크에서 열린 50주년 기념전 ‘앤솔로지’에서도 과거의 영광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작업 세계를 펼쳐 보였다. 전시장을 찾은 세계적 패션 저널리스트 수지 멘키스는 그의 옷을 둘러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작품은 시 같군요.”

오래된다는 것이 반드시 낡아진다는 뜻은 아니다. 진태옥의 60년은 그 증거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다시 보고, 다시 고르고, 다시 판단해온 시간의 결과가 지금의 그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현역’이라는 말의 의미를 가장 조용하고 단단하게 보여주는 인물, 진태옥 디자이너는 오늘도 출근길을 걷고 있다.

이야기씨 김소영 eyak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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